English Creaole 한국발음
How are you? 안녕하세요 Kijan ou ye?/ Kouman ou ye? 카잔 우 에?/코마우에?
I am fine and you? 좋습니다. 당신은요? Mwen byen mèsi e ou? 뮈엔 비엔 메 시 엥 우
Thank you Mèsi 메시
You are welcome Pa gen problem 마 게 프로브렘
Good morning 좋은 아침 Bonjou 봉쥬
Good afternoon좋은오후 Bonswa 봉슈와
Good night 좋은 밤 Bón nui 본 누이
Hi 안녕 Alo 알로
Hello 안녕 Alo 알로
Nice to meet you Mwen kontan rankontre ou 뮈엔 콘타 란콘드레 우
Me too 저두요. Mwen tou 뮈에 투
What is your name?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Kijan ou rele?/ Kouman ou rele? 키잔 우 레레/ 코마 우레레?
My name is 나의 이름은 Mwen rele 뮈엔 레레
Your name is beautiful ,당신의 이름은 아름다워요. Nom ou bèl 놈 우벨
Your are beautiful 당신은 아름다워요. Ou bèl 우벨
You look great 당신은 멋져요 Ou anfóm 우 안훰
I am from USA 나는 미국에서 왔어요 Mwen soti etazini 뮈엔 소티 에타지니
I am Korean 나는 한국인 입니다. Mewn soti kore 뮈엔 소티 고레
Excuse me 실례합니다. Eskizem 엑스 키젬
I am sorry 미안합니다. Padon 파돈
See you again 다시 봅시다 Na wè ankò 나 웨 안코
See you tomorrow 내일 봅시다 Na wè demel 나웨 데메
How old are you? 몇살 입니까? Ki laj ou 키 라지 우?
You are cute 당신은 귀엽습니다. Ou bèl 우벨
Is this your son? 당신의 아들입니까? Eske se pitit gason ou? 에스키 세 피칯 가송 우?
Is this your daughter 당신의 딸입니까? Eske se pitit fi ou? 에스키 시 피칯 휘우?
Yes 예 Wi 위
No 아니요 Non 논
1,2,3,4,5 In, de, twa, kat, sink 엔, 데, 트와, 카트, 싱크
6,7,8,9,10 Sis, sèt, wuit, nèf, dis 시스, 셋, 위트, 네프, 지스
I love you 당신을 사랑합니다. Mwen renmen ou 뮈엔 레메 우
Jesus loves you Jezi renmen ou 제지 레메 우
Jesus is with you Jezi avèk ou 제지 아벡 우
Be with Jesus Avèk jezi 아벡 제지
Bye bye O revwa 오 레브아
God bless you Bondye beni ou 본 지에 베니 우
God bless your family Bondye beni fanmi ou 본 지에 베니 화미우
God loves Haiti Bondye renmen ayiti 본지에 레메 아이티
Jesus is the Savior Jezi se sovè a 제지 세소베 야
Believe Jesus Kwè jezi 쿠에 제지
사진 사역
Come hear Vini 비니
Stand up hear Kanpe la 칸피 라
Sit down Chita 쉬 따
Look hear Gade la 가데라
Go over there Ale la 알레라
Smile Ri Fl
Please Tanpri 탄프리
Thank you for coming Mèsi paske ou vini 메시 피스키 우 비니
Nice picture Bèl 벨
안경사역
Any problem with your eyes? Ou pa gen problem nan zye? 오파 게 프라블렘나 지에
Do you see well at far? Eske ou wè byen de lwen? 에스케 우 웨 비에 데 르웨?
Do you see well at near Eske ou wè byen de prè? 에스케 우 웨 비에 데 프레?
Can you read letters? Eske ou ka li sa? 에스케 우 카리사?
Blurry Pa klè 파클레
Very blurry Pa tro klè 파 크로 글레
See well Wè byen 웨 비에
I don’t see well Mwen pa wè byen 뮈에 파 웨 비에
Cover you left(right ) eye Kouvri zye goch ou/dwat ou 쿠우브리 지에 고쉬 우/드왓우
Cover the other eye Kouvri lòt zye ou 코우브리 라트 즈에 우
Read the letters, please Li lè sa, tanpri 리 레트 사 타프리
What is the letter? Ki lèt sa ye? 키 레 토사 예?
What is it ? Kisa sa ye? 키사 사 예?
Open your eyes, please Ouvri zye ou sil vou plè 오브리 즈에 우 실 브우 프레
Look through the lenses and tell which one you se the best gade nan loup la, edi mwen
nan kisa ou wè pi byen 가데 나 루프 라 , 에디 므웨 나 키사우 웨 피비에?
Look through the hole Gade nan tou a 카데 나 토우 아
Which one is better? The first or second? Kisa ki pi bon, premye a ou byen dezyem nan 카사 키 피바, 프레미에 아우 비에 에지엠 나
Walk a little bit Mache yon ti kras 마쉐
Do you see well and comfortable Eske ou wè byen e alèz 에스키 우 웨 비에 에 아레즈?
Do you feel dizzy? Eske ou santi ou fèb 에스키 우 사티 우 휍?
Is this fine Eske sab yen? 에스케 사 비에?
Tell me how you feel? Di mwen kijan ou santi ou? 디 므에 키자 우 사티 우?
Best Pi bon 피보
Square Kare 카 레
Circle Ron , sèk 라 , 셐
Heart Kè 케
House Kay 카이
Point with the finger the same picture Montre menm foto a 모크레멤 훠토아
Point with the finger the part open Montre pati ki ouvri a 모트레 파티 키 오브리 아
Which direction is open Ki bò ki ouvri 키 보 키 오브리
Top Anlè 아레
Bottom Anba 아바
Right/left Goch/ dwat 고쉬/드왓
Middle Mitan 미탕
의료사역
Cold Grip Rmflq
How do you feel? Kijan ou santi ou? 키잔 우 사티 우?
Where do you feel pain? Ki bò ki ap fè ou mal 키보 키압 훼 우 말?
Are you sick? Eske ou malad? 에스키 우 마라드?
Fever Lafyèv 라휘에브
Headache Maltèt 말테트
Illness Maladi 말라디
Cough Tous 투스
Diarrhea Dyare 지야레
Doctor Doktè 독테
Eyeglasses Linèt 리넷
Medicine Remèd/ medikaman 레레드/메디카마
Nurse Mis 미스
Pain Doulè 도우레
Cure Geri 게리
Temperature tenperari 탄페라티
Toothache Dan-fè- mal 단 훼 말
Vomiting Vomi 보미
Swelling An-fla- ma syon 아 프라 마 시용
What is your problem? Ki problem ou? 키 프라블렘 우?
Sit here and wait, please Chita la e tan, sil-vou-ple
쉬타 라에 탄 실 부 플레
You need to see a doctor Ou bezwen pou ou wè doktè 오우 베즈웬 포우 우 웨 독테
VBS
Stop Kanpe 카피
Pay attention Gade mwen 가데 므웨
Follow me Swiv mwen 스위브 므에
Watch me Gade mwen 가데 므웨
Copy me Gade sou mwen 가데 소 므웨
Hold hands Kanbe men nou 캐베 메 누우
Raise your hand Leve men nou/ men ou 레베 메누/ 메우
Be quiet Fè silans 훼 시라스
Let’s do this An nou fè sa 아누 훼 사
Sing louder Chante fò 샤테 훠
Draw/ color Desine/fe desen 데시네 / 훼 데세
What’s your favorite color? Ki koule prefere ou? 키 쿠레 프레훼레 후
Bible Bib/ la bib 빕/ 라 빕
Beginning/ end Komansman/ la fin 크마스마/ 하훼
Repeat after me Repete aprè mwen 레페데 마르레 므웨
Do you understand? Eske ou Konpran 에스키 우 코프란
Clap your hands Bat men nou 뱃 메 누
Candy Sirèt/ bonbon 시렛/바바
Wednesday, February 4, 2015
Thursday, January 29, 2015
전인적 의료선교사
선교현지인을 전인적 의료선교사로 양성하는 사역
`의료선교라 하면 의료인들이 질병을 고치는 육적인 치료사역을 하고 오는 것으로 만 생각하기 쉽다. 사람은 다 육 (body), 혼 (soul), 영(spirit)를 가지고 있고 세 부분이 분리될 수 없는 복합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잘 각기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역자들이 부분적으로 맡아 일하려고 한다. 의사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고 선생은 복음으로 영혼을 교육하고 목사는 영적인 복음 전하는것이 가장 효과적인 복음사역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가르치며 전파하며 고쳐주는 사역을 하셨는데(마 9:35),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살펴보면 언제나 한 인간의 영, 육, 혼을 다 만지며 care하셨다.(눅9:1, 2, 4:16-19, 마25:35-40)
우리도 역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한 사람 한사람을 대할 때 영,육, 혼의 한사람의 인격 전체가 복음으로 회복되는 전인적 사역을(Wholistic Mission) 지향한다. 이러한 전인적 의료 사역을 현지인들이 직접 해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양육/양성하여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선교가 이루어져 나가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선교지에서 우리 수준의 병원과 각 전문의료진이 있는 의료혜택을 받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문턱이 높다. 실제적으로 극히 소수의 현지인들에게만 의료혜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선진국 의료진들에게 100%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단기의료선교로 비타민, Tylenol, 항생제 투약 정도의 일시적인 의료/구제사역으로는 장기적으로 볼 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첫 단계로 그들의 수준으로 낮추어 간단한 병 치료 및 수술, 위생교육을 할수있도록 현지인들을 의료사역자로 키워서, 전반적으로 그 지역주민들의 위생/보건/진료 상황을 upgrade 시키는 일이다. 기초적인 위생교육, 예방 의학 교육만으로도 현재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질병들의 80%를 퇴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교지 질병/사망률이 대부분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 수준으로는 의과대학 출신 소수의 의사들을 키우는 것 보다는 보조간호사 수준의 간호사를 많이 양성시켜 각 지역 벽촌 구석구석까지 기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 같다. 간단한 병 치료 및 수술, 치과진료와 질병예방, 위생보건, 모자보건 등 위생교육을 함으로써 그 지역 사람들이 질병에서 벗어나 육적인 건강을 유지할수 있도록 이끌어 간다. 간호사가 육적인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음도 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켜 현장으로 보내면 의료선교로써 전인적 선교(Wholistic Mission)를 담당할 수 있는 훌륭한 현지선교사들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영적으로 복음전파/제자양육과 함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들을 가르치며, 소기업/소액대출로 직업을 만들어 주며 그들이 자립할수 있게 함으로써 가난이 퇴치되고 그들의 영, 육, 혼의 필요가 채워지는 전인적 의료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전인적 치유’의 뜻은 예수께서 병 고치실 때, 질병 고치신 일을 whole(온전함)이라는 단어를 쓰심.
<요 5:5> 베데스타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실 때,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렇게 한글성경에는 번역이 됐는데, K.J. version: “Wilt thou be made whole?” -> “온전케 되기를 원하느냐?”라는 뜻으로 씌어 있고, 그를 고친 후에도 <요 5:14>“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영적으로 온전함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병 고침의 사역은 Physical Healing(육적치료)뿐 아니라 혼적, 영적으로도 즉 우리 삶에 영∙육∙혼의 완전함을 가져다주심 (Wholeness, Completeness of our lives)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 개인의 영,육,혼이 복음으로 회복되는 전인적 의료선교로 예수의 제자들이 길러지며 더 나아가서 자기고장의 사회, 경제, 문화, 자연환경 등 모든 영역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총체적선교 (Holistic Mission)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주님만 의지하고 나간다면—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이런 사역이 현지인들에게로 multiply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제자양육이 잘 이루어져 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주는 선교, 내가 가서 다 해 주고 오는 선교의 구제차원 보다는 그들에게 복음으로 교육/훈련시키며 성경적 사업선교로 Kingdom Business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면서 동시에 복음으로 제자양육 함으로써 성경적 지역개발사역 ( Biblical community development ministry,
B.C.D.)이 되어 그들도 질병과 가난의 악순환을 끊고 자신들의 지역을 그들 스스로가 복음으로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소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 현지인들을 전인적 의료 사역자로 양성시키는 사역에 임하고자 한다.
Tuesday, January 27, 2015
의료봉사와 선교
의료봉사와 선교
정용섭(샘터교회 목사, 목협회원)
필자가 좋은 느낌으로 알고 있는 의사들과 연관된 NGO는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MSF)와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Association of Physicians for Humanism)이다. 199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경’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인의협’은 국내 단체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금년이 ‘인의협’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인의협의 활동은 주로 한국국민들의 의료민주화에 집중되는 것 같다. 사회의 전형적인 기득권층에 속하는 의사들께서 이런 운동에 기꺼이 참여한다는 게 필자에게는 뜻밖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목협’(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이 한국교회에서 마이너리티 운동인 것처럼 ‘인의협’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목협과 인의협은 이 세상의 인간다움, 혹은 박애주의(humanism)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셈이다.
목사와 의사
여기서 같은 배를 타고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건 단지 동지적 연대성을 요청하는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다. 종교와 의술은 원래 뿌리가 같다. 성서의 구약시대에 종교를 담당하던 제사장은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종교와 의술의 일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축귀나 치유를 주로 감당하는 무당들의 무속에도 역시 종교와 의술이 비슷한 무게로 작용한다. 대략 3년에 걸친 예수의 공생애에도 이런 현상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의 이런 행위를 오해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사탄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이런 능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것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과학실증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종교는 영적인 분야에 속하고, 의술은 몸에 관여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의사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학 정보에 따라서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목사들은 사람의 몸에 관해 신경을 껐다. 종교가 의학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흡사 중세기의 마녀재판처럼 진리를 훼손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성속이원론, 영육이원론의 차원에서만 옳다. 아무리 과학적 사실을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기계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의학도들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로만 취급해도 좋은 사물은 아니리라.
지금 필자는 목사가 사람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다. 제사장들이 병 치료 역할까지 도맡았던 고대 시절도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경기도 포천의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유(神癒)집회를 필자는 기독교의 미숙성이라고 생각한다. 곳곳의 기도원에서 아픈 사람을 안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안찰을 시행하다가 인명을 다치는 일들도 없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거나 아예 의료의 도움을 거부하는 행위는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생명이 단지 의료행위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게 슈바이쩌의 ‘생명경외’ 사상과 얼마나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도구화될 수 없는, 즉 우리의 과학적 접근을 근원적으로 뛰어넘는 존재론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영 루아흐
성서는 이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이지만 그중에서도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생명 자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자기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개념으로 바꿔 말한다면 흙은 질료이며, 숨은 형상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 이 숨을 불어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그림에는 숨이 손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성서에서는 이 하나님의 숨이 생명의 중심이다. 몸은 이미 세상에 있던 흙에서 왔지만 숨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이 하나님의 숨은 히브리어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영, 또는 바람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영과 바람을 하나로 여겼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 생태계는 바람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사람도 숨을 쉬는가 멈추는가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니 바람이 바로 영이 아니겠는가. 성서에 의하면 사람만이 이 영을 받았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 인의협 회원들이 위의 성서 이야기에 동의하든 않든 큰 상관은 없다. 우리는 최소한 생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신비롭다는 사실, 더 나아가 거룩하다는 사실에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든지 아니면 순전히 기계적 진화론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지 오늘 우리가 그것을 계량화(計量化)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인간의 생명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닐는지.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하고 넘어가자. 예수는 그 당시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법 때문에 자주 논쟁을 벌였다. 아무런 노동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던 안식일에 예수는 장애인들을 치료했다. (율)법 일원론에 빠져있던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을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온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 여기서 사람은 바로 생명을 가리킨다. 이 아포리즘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사람과 그 생명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까? 다른 이들의 일은 접어두고 목사들의 목회 행태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오늘의 목회는 신자들을 다루는 기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교도 일종의 선동이 되고 말았다. 교회성장 만능론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한국에 얼마나 될는지, 필자는 자신이 없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서 불거진 문제이지만, 소위 단기선교도 역시 이런 교회의 전략적 사고방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1990대 이후 신자들을 결집해 낼만한 신앙적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해외선교는 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없이 단순히 목회 전략적 차원에서 수행된 단기선교는 이번과 사태와 같은 결과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과 민족을 둘러 싼 아주 복합적인 삶의 흔적들을 외면한 채 땅 끝까지 가야 한다는 신앙적 열망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필자는 이번 사태에 연루된 분들의 신앙적 진정성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선교행위들이 전략적인 착상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인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 인식의 문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인간, 세계, 역사에 관해서 꾸준히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교회는 자기들도 모르는 순간에 기독교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마련이다. 앞서 예로 든 바리새인들이나 중세기 마녀재판장들이 그 전형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었고, 중세기 교회는 교회 체제를 절대화하게 되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한국교회의 선교지향성도 이런 자기 절대화의 부산물이다.
구원론적 의료행위
앞에서 목사들이 목회행위를 기술로 접근한다고 지적했는데, 의사들은 어떨까? 인간과 생명을 수단화하는 의사들은 없을까? 거꾸로 인간과 생명의 거룩성을 의식하는 의사들은 있을까? 생명의 존재론적 세계를 경험한 의학도들은 얼마나 될까? 의료행위마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파묻혀 버린 이 시대에 말이다. 생명을 존재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은 억지로 가르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어떤 깨우침이든지 결국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다. 의과대학교 커리큘럼이 어떤지는 문외한인 필자는 전혀 모른다. 혹시 의료윤리라는 과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과목의 학점을 이수했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목회의 상업화와 의술의 상업화는 교육의 상업화와 더불어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이다. 목사도 먹고 살아야 하고, 의사도 먹어야 하고, 선생도 먹고 배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구별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에만 그들의 행위는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받을 수 있다. 자칫 필자의 언급이 설교 조로 흐를 염려가 있어서 이 대목은 그만 두려고 한다. 다만 종교와 의술은 행위자가 그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 그 근본이 허물어진다는 것만은 확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발제의 제목은 “의료봉사와 선교”이다. 아마 의료 선교를 염두에 둔 제목으로 보이는데,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이 제목은 의료를 통한 봉사가 곧 선교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는 선교보다는 의료봉사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의 논의와 연결해서 필자의 생각에 의료는 근본적으로 봉사가 아니다. 의료 행위는 의술을 통해서 이웃을 섬긴다기보다는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어머니가 저녁식탁을 준비하면서 가족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식적으로는 봉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삶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더 테레사가 자기의 행위를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에 참여했을 뿐이다.
어쩌면 오늘 필자의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또는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인의협의 사업인 노숙자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사업이 봉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봉사에 나서는 것만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 의사들 중에서 과반수가 인의협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확 바뀔지 모른다. 필자는 봉사의 차원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게 쉽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의 봉사는 일종의 개량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봉사한다는 말에는 이미 상대를 대상화한다는 뜻이 있으며, 이 대상화는 분별심을 그 뿌리로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분별심이 모든 잘못된 생각의 시작이다. 봉사, 상대화, 분별심을 뛰어넘어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의료행위가 참된 의미에서 의료봉사이며, 참된 의미에서 선교가 아닐는지.
하나님은 생명이다.
생명 사건에 온 영혼으로 참여하는 행위가 곧 종교이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영혼은 몸과 대비되는 정신적 생명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장 궁극적인 생명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진다. 티베트 불교도들 중에서는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오체투지로 그들의 성지인 라싸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가장 심층에 놓인 생명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명 앞에서 진지한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곧 생명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만약에 우리가 생명에 참여한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지금 목사와 의사는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와 의사의 직무는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그런 점에서 거룩하다. 생명이 거룩하다면 그 생명을 치료하는 의사도 거룩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거룩하다는 단어 “하기오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구별되다.’는 뜻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서 의사와 목사의 직업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특히 생명을 거룩하게 접근함으로써 목사와 의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목사와 의사가 거룩하게 접근해야 할 생명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각자 나름으로 생명의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 생명은 무엇인가? 생물학과 물리학, 심리학과 사회학이 생명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완료된 대답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명이라는 대양에 이제 겨우 배를 띄우고 항해를 시작한 것과 같다. 단적으로 노화의 비밀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생체 시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생명의 비밀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추적하는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그 생명 현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생명의 본질이 완전히 해명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날이 요원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앞서 잠간 짚은 대로 생명은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이며, 신비가 아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따라서 박애주의자(humanist)와 박애적 기독교인(humanistic christian)으로 갈라진다. 생명을 단지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유기적 현상이라고만 본다면 그는 박애주의자이며, 초월적 힘의 개입이라고 본다면 기독교인이다. 생명의 내재에 방점을 찍는가, 아니면 생명의 초월에 찍는가의 차이이다. 이런 구분이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옳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지금 필자는 박애적 기독교인이 박애주의자보다 도덕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차이를 짚었을 뿐이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박애정신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풍부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병든 생명을 치유하는 일은 우리자신까지 치유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선교이다. (2007년 9월18일, ‘인의협’ 대구지부 월례모임 발제)
정용섭(샘터교회 목사, 목협회원)
필자가 좋은 느낌으로 알고 있는 의사들과 연관된 NGO는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s sans Frontieres/MSF)와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Association of Physicians for Humanism)이다. 199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경’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인의협’은 국내 단체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눈에 뜨이지는 않았다.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금년이 ‘인의협’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인의협의 활동은 주로 한국국민들의 의료민주화에 집중되는 것 같다. 사회의 전형적인 기득권층에 속하는 의사들께서 이런 운동에 기꺼이 참여한다는 게 필자에게는 뜻밖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목협’(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이 한국교회에서 마이너리티 운동인 것처럼 ‘인의협’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목협과 인의협은 이 세상의 인간다움, 혹은 박애주의(humanism)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셈이다.
목사와 의사
여기서 같은 배를 타고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건 단지 동지적 연대성을 요청하는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현실적 판단이다. 종교와 의술은 원래 뿌리가 같다. 성서의 구약시대에 종교를 담당하던 제사장은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종교와 의술의 일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축귀나 치유를 주로 감당하는 무당들의 무속에도 역시 종교와 의술이 비슷한 무게로 작용한다. 대략 3년에 걸친 예수의 공생애에도 이런 현상들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의 이런 행위를 오해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사탄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이런 능력을 행사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것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에나 해당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과학실증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종교는 영적인 분야에 속하고, 의술은 몸에 관여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의사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학 정보에 따라서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목사들은 사람의 몸에 관해 신경을 껐다. 종교가 의학에 왈가왈부하는 것은 흡사 중세기의 마녀재판처럼 진리를 훼손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성속이원론, 영육이원론의 차원에서만 옳다. 아무리 과학적 사실을 신봉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기계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의학도들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단백질 덩어리로만 취급해도 좋은 사물은 아니리라.
지금 필자는 목사가 사람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다. 제사장들이 병 치료 역할까지 도맡았던 고대 시절도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경기도 포천의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유(神癒)집회를 필자는 기독교의 미숙성이라고 생각한다. 곳곳의 기도원에서 아픈 사람을 안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안찰을 시행하다가 인명을 다치는 일들도 없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거나 아예 의료의 도움을 거부하는 행위는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생명이 단지 의료행위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게 슈바이쩌의 ‘생명경외’ 사상과 얼마나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도구화될 수 없는, 즉 우리의 과학적 접근을 근원적으로 뛰어넘는 존재론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영 루아흐
성서는 이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이지만 그중에서도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생명 자체라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자기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개념으로 바꿔 말한다면 흙은 질료이며, 숨은 형상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 이 숨을 불어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그림에는 숨이 손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성서에서는 이 하나님의 숨이 생명의 중심이다. 몸은 이미 세상에 있던 흙에서 왔지만 숨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이 하나님의 숨은 히브리어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영, 또는 바람이라는 의미이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영과 바람을 하나로 여겼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 생태계는 바람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사람도 숨을 쉬는가 멈추는가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니 바람이 바로 영이 아니겠는가. 성서에 의하면 사람만이 이 영을 받았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 인의협 회원들이 위의 성서 이야기에 동의하든 않든 큰 상관은 없다. 우리는 최소한 생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신비롭다는 사실, 더 나아가 거룩하다는 사실에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하나님의 창조로 보든지 아니면 순전히 기계적 진화론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지 오늘 우리가 그것을 계량화(計量化)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인간의 생명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닐는지.
다시 예수의 이야기를 한 마디 더 하고 넘어가자. 예수는 그 당시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라 할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법 때문에 자주 논쟁을 벌였다. 아무런 노동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던 안식일에 예수는 장애인들을 치료했다. (율)법 일원론에 빠져있던 바리새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을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온 예수님의 아포리즘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 여기서 사람은 바로 생명을 가리킨다. 이 아포리즘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사람과 그 생명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까? 다른 이들의 일은 접어두고 목사들의 목회 행태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오늘의 목회는 신자들을 다루는 기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설교도 일종의 선동이 되고 말았다. 교회성장 만능론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한국에 얼마나 될는지, 필자는 자신이 없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서 불거진 문제이지만, 소위 단기선교도 역시 이런 교회의 전략적 사고방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1990대 이후 신자들을 결집해 낼만한 신앙적 동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해외선교는 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 없이 단순히 목회 전략적 차원에서 수행된 단기선교는 이번과 사태와 같은 결과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과 민족을 둘러 싼 아주 복합적인 삶의 흔적들을 외면한 채 땅 끝까지 가야 한다는 신앙적 열망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필자는 이번 사태에 연루된 분들의 신앙적 진정성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선교행위들이 전략적인 착상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인격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학적 인식의 문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인간, 세계, 역사에 관해서 꾸준히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는 교회는 자기들도 모르는 순간에 기독교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마련이다. 앞서 예로 든 바리새인들이나 중세기 마녀재판장들이 그 전형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었고, 중세기 교회는 교회 체제를 절대화하게 되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한국교회의 선교지향성도 이런 자기 절대화의 부산물이다.
구원론적 의료행위
앞에서 목사들이 목회행위를 기술로 접근한다고 지적했는데, 의사들은 어떨까? 인간과 생명을 수단화하는 의사들은 없을까? 거꾸로 인간과 생명의 거룩성을 의식하는 의사들은 있을까? 생명의 존재론적 세계를 경험한 의학도들은 얼마나 될까? 의료행위마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파묻혀 버린 이 시대에 말이다. 생명을 존재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은 억지로 가르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어떤 깨우침이든지 결국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다. 의과대학교 커리큘럼이 어떤지는 문외한인 필자는 전혀 모른다. 혹시 의료윤리라는 과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과목의 학점을 이수했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목회의 상업화와 의술의 상업화는 교육의 상업화와 더불어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이다. 목사도 먹고 살아야 하고, 의사도 먹어야 하고, 선생도 먹고 배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구별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에만 그들의 행위는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받을 수 있다. 자칫 필자의 언급이 설교 조로 흐를 염려가 있어서 이 대목은 그만 두려고 한다. 다만 종교와 의술은 행위자가 그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 그 근본이 허물어진다는 것만은 확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 발제의 제목은 “의료봉사와 선교”이다. 아마 의료 선교를 염두에 둔 제목으로 보이는데,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이 제목은 의료를 통한 봉사가 곧 선교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는 선교보다는 의료봉사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의 논의와 연결해서 필자의 생각에 의료는 근본적으로 봉사가 아니다. 의료 행위는 의술을 통해서 이웃을 섬긴다기보다는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컨대 어머니가 저녁식탁을 준비하면서 가족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형식적으로는 봉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삶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더 테레사가 자기의 행위를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에 참여했을 뿐이다.
어쩌면 오늘 필자의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또는 공허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인의협의 사업인 노숙자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사업이 봉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봉사에 나서는 것만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 의사들 중에서 과반수가 인의협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면 세상은 확 바뀔지 모른다. 필자는 봉사의 차원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는 차원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그게 쉽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의 봉사는 일종의 개량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봉사한다는 말에는 이미 상대를 대상화한다는 뜻이 있으며, 이 대상화는 분별심을 그 뿌리로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분별심이 모든 잘못된 생각의 시작이다. 봉사, 상대화, 분별심을 뛰어넘어 생명 사건에 참여하는 의료행위가 참된 의미에서 의료봉사이며, 참된 의미에서 선교가 아닐는지.
하나님은 생명이다.
생명 사건에 온 영혼으로 참여하는 행위가 곧 종교이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영혼은 몸과 대비되는 정신적 생명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장 궁극적인 생명 현상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던진다. 티베트 불교도들 중에서는 수년의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오체투지로 그들의 성지인 라싸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가장 심층에 놓인 생명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명 앞에서 진지한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곧 생명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만약에 우리가 생명에 참여한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지금 목사와 의사는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목사와 의사의 직무는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그런 점에서 거룩하다. 생명이 거룩하다면 그 생명을 치료하는 의사도 거룩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거룩하다는 단어 “하기오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구별되다.’는 뜻이다. 다른 직업에 비해서 의사와 목사의 직업이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특히 생명을 거룩하게 접근함으로써 목사와 의사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목사와 의사가 거룩하게 접근해야 할 생명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각자 나름으로 생명의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그 생명은 무엇인가? 생물학과 물리학, 심리학과 사회학이 생명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완료된 대답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명이라는 대양에 이제 겨우 배를 띄우고 항해를 시작한 것과 같다. 단적으로 노화의 비밀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생체 시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생명의 비밀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추적하는 우리 인간 자체가 바로 그 생명 현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생명의 본질이 완전히 해명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날이 요원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앞서 잠간 짚은 대로 생명은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이며, 신비가 아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따라서 박애주의자(humanist)와 박애적 기독교인(humanistic christian)으로 갈라진다. 생명을 단지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유기적 현상이라고만 본다면 그는 박애주의자이며, 초월적 힘의 개입이라고 본다면 기독교인이다. 생명의 내재에 방점을 찍는가, 아니면 생명의 초월에 찍는가의 차이이다. 이런 구분이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옳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지금 필자는 박애적 기독교인이 박애주의자보다 도덕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차이를 짚었을 뿐이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박애정신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풍부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병든 생명을 치유하는 일은 우리자신까지 치유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선교이다. (2007년 9월18일, ‘인의협’ 대구지부 월례모임 발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안 승 오(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지난 반세기 동안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일 것이다. 이 개념이 처음에는 주로 진보적 개신교 진영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잇따라서 동방정교회,가톨릭교회,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었다. 결국 이 개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그 교회들의 선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드 보쉬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지난 반세기의 선교신학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개념이었음을 말하고 있다.1)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또한 본래 그개념을 제창하였던 이들의 본래적인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음도 지적하고 있다.2) 즉 하나님의 선교는 뭔가 왜곡되고 편중되게 이해되어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개념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에 의한 선교 역시 부분적으로 왜곡되어진 점이 있게 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개념이 본래 어떤 의도에서 제안되어졌고, 어떻게 이해되어져 왔는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바른 방향 정립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선교 개념 태동 배경과 주된 내용
1) 데이비드 J.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김병길 장훈태 공역, (서울: 기독교문
서선교회, 2000), 576-577쪽.
2) 위의 책, 580쪽.
336 長神論壇 22집(2004) - 336 -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식민지가 붕괴되면서 서구선교는 많은 점에서 장애물을 만났다. 우선 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과거의 민속종교나 전래 종교로의 복귀를 시도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을입국 제한시키거나 추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전 인류의 3분의 1 가량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권 아래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선교에 대한 강력한 방해 내지는 탄압이 자행되었으므로 서구 선교는 상당한 장애를 겪게 되었고,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선교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전통적인 선교활동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구 선교는 대단히 위축되게 되었다. 또한 서구교회는 자신들이 행해 온 선교가 제국주의 팽창과 깊이 연루되어서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죄악을 범하였으며, 2차에 걸친 야만적인 세계대전이 소위 기독교 국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 전쟁으로 자신들의 온갖 수치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비서구 세계에 말할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들이 전한 복음은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으로 옷 입혀져 있었으며, 자신들의 선교자세는 가부장주의, 비관용, 오만함 등으로 점철되었으며, 문화파괴, 사회구조 와해, 전통 종교 억압, 낯선 이방 교회 설립, 정체성 손상 및 정체성 형성의 저해 등을 가져오게 되었고, 피선교지의 교회가 서구에 종속되는 불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3)
아울러 이러한 잘못에 대한 비난까지 받으면서 서구교회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다가 과거에 선교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되던 제 3세계에도 제법 기독교가 많이 성장하게 되면서 불평등한 관계의 청산과 제국주의와 결탁한 서구교회와의 단절을 추구하면서 자립교회의 확립과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다.4)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952년 IMC(Internatioal Missionary Council)빌링엔 대회는 승리자나 정복자의 태도가 아닌 희생과 섬김의 자세가필요함을 깨닫고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 라는 주제로 선교대회를 가
3) 김영동,『교회를 살리는 선교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3),259-260쪽.
4)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5), 23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37 - 337 -
졌다. 정복적이고 전투적인 서구식 십자군의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십자가의 선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빌링겐 대회가 끝난 후 독일 슈트트가르트 교구의 감독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은 빌링엔 대회의 신학적 성과를 개인적으로 요약하면서 Missio Dei라는 라틴어 술어를 처음 사용하였다.5) 그러니까 이 용어는 전통적으로 행해왔던식민주의적인 오만한 선교자세를 교정하고 선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노력가운데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하르텐슈타인은 이 용어를 말할 때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적극수용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을 모든 인간적 열정(Pathos), 즉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속삭이는 모든 인간 중심주의(Anthropozentrismus)와 인간열정주의(Anthropotathismus)와의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 위치로 돌려놓은 것이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보았고, 모든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해 위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학을 추구함으로써 그 당시 선교의 잘못된 동기와 목표를 수정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모든 인간중심주의와 인간 열정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선교의 개념을 변화시킨 ‘Missio Dei'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학적 원리의 절대화와 모든 형태의 선교의 자기 의인화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며, 그 분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하였다. 선교의 주체와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선교하는 자는 오직 그의 속죄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6)
그는 이같은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말함으로써 전통적인 개종과 교회 설립을 위한 선교를 넘어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포
5) 그가 말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선교란 단순히 개인의 회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의 보내심(an der Sendungdes Sohnes), 즉 하나님의 선교(der Missio Dei)에 참여하는 것이다.”;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in Walter Freytag ed., Mission zwishen Gestern und Morgen (Stuttgart: Evang. Missionsverlag, 1952), p. 54.
6) K. Hartenstein, “Krisis der Mission?” in Die Furche 17 (1931), pp. 205-206.
338 長神論壇 22집(2004) - 338 -
괄적이고 통전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말함으로써 선교신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 같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말할때, 그는 선교를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활동으로이해하는 종말론적 시각과 선교를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안의 결정적인 예표로 보는 구원사적 시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7)
III.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전개 방향
하르텐슈타인은 Missio Dei라는 용어를 처음 말하였지만 그 용어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설명을 하지 못한 채, 곧 타계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에 Missio Dei개념은 비체돔과 후켄다이크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체돔은 주로 구속사적 관점을 많이 강조한 반면, 후켄다이크는 주로 종말론적 관점을 많이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이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의하여 수용되어질 때는 주로 후켄다이크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어졌는지를 살펴보자.
A. 후켄다이크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사람은 네덜란드의 신학자 후켄다이크(J. C. Hoekendijk)이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전도부초대 간사 및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선교협의회(IMC)의 협력위원회 간사(1949-952)로 일했다. 후켄다이크의 불만은 우선적으로 교회가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 되고 선교 중심적이 되지 못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은 틀린 중심을 잡고 회전하기 때문에 항상 정도에서 벗어나기 마련이고 선교의 범위가 불가피하게 축소된다고 보았다. 즉 선교의 전 지평이 교회에 의하여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히
선교는 교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고, 교회를 에워싼 세계를 교회론적인 범주로 정의하게 되며 세계는 더 이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36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39 - 339 -
일종의 훈련장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8) 아울러 이 같은 교회중심의 선교관은 선교를 곧 ‘교회화’로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형성과 교파증식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전도를 행할 때에도 “...교회의 영향력을 다시금 획득하려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다”9) 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교회중심적인 선교 이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고 이런 점에서 그는 교회중심적인 선교 이론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중심적 선교관을 ‘교회주의 이단’으로 보면서 교회론을 “왕국-복음-파송-세계”라는 틀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회를 “왕국-복음-파송-세계”의 컨텍스트 속에서 논의할 때에 여기에서 교회는 고정된 자리가 없다고 보았다.10)
똑같이 Missio Dei라는 용어를 말하면서도 아들의 파송이나 교회의 파송을 강조한 비체돔과는 달리 후켄다이크는 하나님 자신의 파송을 강조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님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는 교회가 교회적 구조들로부터 나와서 기동성 있는 그룹들로 개방되어야 하며, 세속화되어야 하고, 현대 세계속의 인간들과 완전한 동일화(full identificaion)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이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세계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화되었지만, 교회의 중요성과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선교의 목표를 ‘샬롬’으로 보았다. 샬롬은 인간 영혼구원 이상의 것으로 평화, 정직, 공동체, 조화, 정의 등의 포괄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샬롬이 메시야가 추구한 핵심적인 요소라는 근거로 메시야가 평강의 왕이라는 말씀(사 9:6), 이 사람이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는 구절(미5:5), 그가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는 말씀(슥 9: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등을
8) J. Hoekendijk,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I.R.M., July, 1952, pp. 324-332.
9) J. C. 후켄다이크,『흩어지는 교회』이계준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10쪽.
10) J. Hoekendijk,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p. 333.
11) Ibid., pp. 77-78.
340 長神論壇 22집(2004)- 340 -
말한다.12) 그는 샬롬을 사회적 사건으로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13) 교회는 이 샬롬을 만들어감으로써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 같은 샬롬 이해 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선교를 특별히 현재적 종말의 시각에서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선교를 처음 말한 하르텐슈타인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벌써’와 ‘아직 아니’의 철저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아직 아니’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 반면, 후켄다이크는 하나님의 활동과 실제 이 땅위에 펼쳐지고 있는 세계 역사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를 현재적 종말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켄다이크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지나치게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 해석한경향이 있었으며, 이것은 하르텐슈타인이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14)
B. 비체돔 (Georg F. Vicedom)
게오르규 F.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책을 써서 Missio Dei의 개념을 널리 퍼지도록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하르텐 슈타인의 ‘Mission Dei'를 주로 구속사적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를 하나님의 창조와 활동을 나타내는 총괄개념(Inbegriff)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의 선교 역사를 곧 ‘구원사’(Helisgeschichte)로 보았다. 그가 하나님의 선교를 구원사적으로 본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것과 반대인 이 세상 나라의 통치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말할 수 있다고 믿는 바의 소원들을 결코 이루어주지 않는다. 그는
12) J. C. Hoekendijk,『흩어지는 교회』17쪽.
13) 위의 책, 17-18쪽.
14) 김은수,『현대선교의 주제와 흐름들』139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41- 341 -
사람들이 그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결코 허용치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한다.15) 이런 점에서 비체돔은 후켄다이크처럼 샬롬을 이 땅위에 이루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는 “...예수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은 항상 회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항상 그릇된 목표를 세울 것이며, 아무리 경건한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는 세상 나라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16)
라고 말하면서, 선교의 목표를 모든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일로 말하고 있다.17) 또한 비체돔의 교회관은 후켄다이크의 그것처럼 많이 부정적이지 않다. 물론 비체돔도 교회 자체가 선교의 출발점, 목표, 주체로 인식되는것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것은 선교를 위한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교회가 여전히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구속사 완성의 목표를 위하여 아들을 파송하며 아들의 파송은 그의 교회를 통해서 지속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첫 번째 선교사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원의 활동은 현재한다.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교회의 선교를 가능하게 하며 교
회는 하나님의 공적인 구원공동체로서 표시되고 구원의 역사적 현재로부각되는 것이다.18) 그는 선교의 목표를 “... 모든 인간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일”19) 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의 교회의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후켄다이크가 선교의 과제를 세상에서 샬롬을 이루는 것으로 보면서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
15) 게오르크 F. 비체돔,『하나님의 선교』박근원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1980), 40-41쪽.
16) 위의 책, 41쪽.
17) 위의 책, 130-131쪽.
18) 위의 책, 163-164쪽.
19) 위의 책, 130쪽.
342 長神論壇 22집(2004)- 342 -
상을 섬기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교회의 위치를 상당히 축소시킨 경향이 있는데 비하여,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C. 세계 교회 협의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 방향을 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협의회는 1950년대 이후로 후켄다이크의 강한 영향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에 후켄다이크의 Missio Dei 개념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먼저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연관된 WCC의 선교목표를 보면 후켄다이크가 주장했던 선교의 목표인 샬롬이 주된 선교의 목표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서 샬롬의 범위는 교회 안이 아니라 전 세계를 포함하며, 영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실존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전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Missio Dei는 이 모든 것의샬롬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며 교회는 그 선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20)
이 같이 광범위한 샬롬이 내용이 WCC의 대회에서는 다양한 형태로표현되었는데, 1968년 웁살라 대회의 경우엔 인간화로 표현되었다. 웁살라 총회 제 2분과 위원회에서는 인간화(humanization)를 선교의 목표로삼았다. 즉 오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에 대한 문제이며, 모든 비인간화의 현상을 극복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일차적과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같은 인간화의 진정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되었으며, 예수의 인간성을 드러내어 예수와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선교의 주된 목표로 제시되었다.21)
또한 1975년 나이로비 대회에서는 선교의 주제를 “정의, 참여, 지탱될 만한 사회”(JPSS: a Just, Participatory, Sustainable Society)로 보았고, 1983년 벤쿠버와 1990년 서울 대회에서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JPIC: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을 주제로 삼았으며,22)
20)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79쪽.
21) Norman Goodall, ed. The Uppsala Report 1968 (Geneva, WCC, 1968),pp. 27-29.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43- 343 -
1991년 캔버라로 오면서 창조질서의 보존을 특별히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시켰다. 즉 캔버라는 생명의 신학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초시키고, 창조세계 속에 현존하시는 성령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결과로 하나님의 선교는 매우 폭넓은 선교의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넘어서서 샬롬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역자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 세계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하는 일들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의 견지에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이해하면서 그 변화를 위한 일과 투쟁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초점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발견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출발점이요 현장이다. 신자들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제 분야에 파송되어지고 교회와 세상은 분리가 아닌 공동 운명적인 연대관계에 선다. 그리스도의 주권성은 신자들에게 영적 진리에 대한 강조보다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고취시킨다.
즉 강조점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겨지면서 교회는 단지 세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는 부름 받은 공동체인 교회로부터 출발하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현장인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세상에 강조점이 주어지면서 교회는 단지 구원받은 세계의 한 표상의 부분에 불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계는 세계이고 교회는 세계의 부분으로서 정의된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명제인 “하나님-교회-세계”의 순서는 “하나님-세계-교회”로 뒤바뀌게 된
다.23) 이 같은 이해 위에서 결국 선교의 주체가 교회이고 교회의 확장이 곧 선교의 성적표임을 말하던 교회의 선교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IV.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기여점 및 제한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확실히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이 개념은
22) 이형기,『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에 나타난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333쪽.
23) WCC, The Church for Others: Two Reports on the Missionary Structure of the Congregation (Geneva: WCC, 1968), pp. 16-17.
344 長神論壇 22집(2004)- 344 -
WCC의 선교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 중의 하나가 되어 세계 선교의향방을 주도하면서 세계선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갱신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또한 여러 가지 약점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여점과 약점을 잘 분석해보는 것은 이 개념의 새로운 방향정립을 위하여 중요한작업이 될 것이다.
A. 교회의 선교 자세를 갱신케 함
세상의 많은 기관들이 그렇듯이 지상위의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쉽게 내향적이 되고, 기구화 되고, 자체의 성장과 수적인 확장에만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선한 의도에서 선교를 하면서도 쉽사리 자기 교파의 확장과 강화와 유지를 위하여 공간적 및 양적 교세 확장적인 선교를 수행하게 되기 쉽다. 아울러 각파의 신앙고백과 신조를 중심한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 사상과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 교파 혹은 개교회 중심의 선교사상과 운동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선교보다는 개 교회 혹은 개 교파의 이익과 명예를 앞세우는 선교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24)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이런 교회와 교회의 선교를 향하여 선교의 참된 인도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일깨워줌으로써 교회가 기구화 되고내향화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교회는 그 어떤 형태로든 그 자체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었던 것이다. 또한 교회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증거 할 때 비로소 참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B.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일깨워 줌
이스라엘의 존재목적이 그러했듯이 교회의 존재 목적 역시 세상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결코 교회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종종 희랍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와 세계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보아온 경향이 있다. 교회는 종종 자신만을 위한 담을
24) 이장식,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검토,”『기독교 사상』1977년 6월호, 7쪽.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45 - 345 -
높이 쌓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세상에 대하여는 무책임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바로 세계에 있음을 강하게 일깨워주었고, 이로 인해 격변하는 세계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아울러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줌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선교의 영역과 과제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25)
C. 선교 개념의 폭을 넓혀 줌
보쉬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우리가 다시 좁고 교회 중심적인 선교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26)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선교 개념을 폭넓게 만든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선교개념을 무작정 넓혀서 선교의 핵심자체를 놓치고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제대로 실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선교의 과제를 제대로 일깨워주어서 사회구조개편과 창조 질서의 회복 등의 주제를 선교에 포함시킴으로 말미암아 폭넓은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선교가 영혼구령과 교회개척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위한 예언적 직무와 사도적직무를 균형감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준 것은 Missio Dei의 공헌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신학의 방향에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음으로써 선교를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D. 샬롬 개념의 편중
하나님의 선교에 의한 선교의 목표는 샬롬으로 제시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후켄다이크가 이해한 샬롬은 주로 사회적 사건이며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생명에 관
25) 김은수,『현대선교의 주제와 흐름들』125쪽.
26)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81쪽.
346 長神論壇 22집(2004)- 346 -
계되며 그 안에 종사하고 있는 손길들을 통해 ‘생명과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27) 교회는 이 평화를만들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샬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상당 부분 현실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샬롬, 즉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샬롬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샬롬의 개념은 구약에 많이 나타나며, 구약에 사용된 ‘샬롬’의 정의 중 일부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샬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샬롬 개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샬롬이란 하나님께서 계약에 따라 행동하신 결과이자 공의의 결과라는 사실이다(사 32:17).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지 아니한 샬롬은 거기에 어떠한 샬롬의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구약이 의도하는 샬롬이 아니다. 구약이 말하는 샬롬은 평정, 평강, 안정 등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즉 구약에 나타난 샬롬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되는 것이다.28) 즉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의 샬롬이든 정치적 사회적차원의 샬롬이든 그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켄다이크와 WCC의 샬롬 이해는 샬롬의 근본 뿌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샬롬의 결과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또한 샬롬의 내용을 개인적인 차원의 것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것으로 많이 강조하는 경향도 한편으로 편중된 느낌이 있다.29)
E. 교회 자체의 약화를 가져옴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르텐슈타인이나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위치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 하르텐슈타인은 “교
2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125쪽.
28) R. 레어드 해리스 외,『구약원어신학사전 하』(서울: 요단출판사, 1986),1163-1164쪽.
29) 이현모,『현대선교의 이해』(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2000), 86-87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47- 347 -
회는 땅위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중심이자 세계 역사의 중심”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수행자(Trägerin)”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공동체30)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호켄다이크와 그 영향을 받은 WCC는 세상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다가 그만 교회를 너무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물론 그들이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너무 지나치게 한쪽을 강조하다가 다른 한쪽을 놓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후켄다이크의 신학은 무교회신학(non-church theology)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31) 서정운은 후켄다이크의 선교신학에 대하여 많은 공헌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교회관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어쩌면 오늘의 서구교회가활력을 잃고 신자의 수가 현저히 준 것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은 반교회중심신학(反敎會中心神學)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32)고말한다.
후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가 왜 이처럼 약한 교회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까? 후켄다이크는 교회가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세속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이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한 것은 좋지만, 교회와 세상 사이의 담이 완전히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 결국 교회는 세상을 제대로 섬길 수 없게된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정체성 유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속에서 잘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목적은 열방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기에 이스라엘이 열방과 섞이는 것을 엄히 경계하셨다. 어차피 열방을 섬길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열방과 교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왜 그토록 철저하게 열방과 섞이는 것을 막으셨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먼저 확실히 세우시려는 목적에서
30) Karl He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pp. 58f.
31) Thomas Shivute, “The Theology of Mission and Evangelism,” in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from Edinburgh to New Delhi (Helsinki:The Finish Society for Missiology and Ecumenics, 1980), p. 194.
32) 서정운, “후켄다이크의 선교관” in『교회와 신학』제 20집, 1988년, 222쪽.
348 長神論壇 22집(2004)- 348 -
였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섬기는 것에 앞서서 해야 할 일은 먼저 자신의정체성을 굳건하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이었다.33)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로 섬긴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것보다 더 앞서서 해야 할 일은 바로 교회를 바로 서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교회를 무시하며, 전통적 교회를 타락의 상징처럼 보는 경향은 오히려 교회가 제대로 세상을섬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후켄다이크의 오류는 성과 속의 구분을 완전
히 철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회로 하여금 더욱 세상을 잘 섬길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치 막시즘이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켄다이크의 생각 역시 현실화되지 않았다.34) 교회가 세상을 참으로 섬기고 변화시키려면 여전히 성과 속은 구분되어야 하고, 성을 성으로 유지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교회 자체의 성스러움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세상을 섬기어 성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후켄다이크는 또한 하나님의 선교가 세상 속에 있는 세속적인 기관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역사하시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불러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의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기관들이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위하여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과 동일하게 인식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필요도 없었고,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없었다. 선지자들을 보내실 필요도 없었고, 제자들을 따로 세우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속적인 기관들을 통해서도
33) John H. Piet, The Road Ahead: Theology for the Church in Mission(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pp. 41-42.
34) 채수일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고 실천했던 교회의 목회자들이 가난 때문에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을 지속할 수 없어서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선 반면,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엄청난 자본의 힘을 가지고 대규모적으로 사회봉사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채수일,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한국에서의 전개와 과제” in 선교와 문화,『선교신학』제 6집 (서울: 한들출판사,2002), 259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49- 349 -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고 하면서 교회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주장은 구원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선교에서 일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자꾸 강조하면 결국 교회는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어도 일할 일군이 많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동기가 많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쉬는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들을 단지 기능적으로, 결론적으로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호켄다이크의 경향은 우리를 어디에도 인도하지 못한다.”35) 아울러 보쉬는 평생을 통해 가차 없이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론을 위한여지가 전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호켄다이크 마저도 후에는 교회를향하여 등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발견했다고 언급한다.36)
F.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혼동 가능성
후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로 세상에서그리고 세상의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그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사회 정의와 복지를 위한 모든 활동도 다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역사발전, 역사와 종말론의 문제 및 역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역사 내재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구속사를 세속사와 완전히 일치되게 보는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참여를 높일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반면, 사회적 해방이 기독교의 구원으로 혹은 정치적 투쟁이 선교 활동으로 인식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37) 이런 점에서 보쉬는 “세속역사와 구속역사가 비록 분리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건설이 직접적으로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지 않는다”38)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35)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697-698쪽.
36) 위의 책, 572쪽.
3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들』125쪽.
350 長神論壇 22집(2004)- 350 -
WCC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논리에 따르면 구조적 악이 있고 이에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면 이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교회는 이 활동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서 협력해야 하고 이것이 교회의선교가 된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행위를 통해 실현되는 사회정의가 하나님의 일로 암시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혁명적 행동이 하나님의 일로 신성시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회적, 구조적 악에 대항하는 활동들 중에는 그 결과가 또 다른구조적 모순을 만들거나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볼 때에 악에 대항하는 운동을 섣불리 하나님의 선교와 동일시하는 것엔 문제가있음을 보게 된다.39) 이런 점에서 덴마크의 선교학자 아가르도는40)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잘못되면 인간의 모든 세속적 활동을 무조건 거룩한 것으로 인정하는 모순을 범한다고 지적하였다.41)
H. 복음 전도 중심의 선교 약화 가능성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조금 극단화되면 전통적인 복음 선교가 불필요하거나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배제되는 지점까지 나갈 수 있게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선교를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교회의 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잘못 강조38)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74쪽. 죤 브라이트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국가나 정치, 또는 국가의 부강함과 번영, 심지어 종교나 종교 개혁을위한 온갖 노력,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백성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땅의 질서는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의 근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우스꽝스럽게 모방한 것 밖에 안된다.”; 죤 브라이트,『하나님의 나라』김철손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92), 163쪽.
39) 이현모,『현대선교의 이해』87쪽.
40) Johannes Aagaard, “Mission After Uppsala 1969,” Mission Trends No.1, Gerald Anderson, ed. (Grand Rapids, Eerdmans, 1974), p. 17.
41)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110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51- 351 -
되다보면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기여를 결코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링(Aring)에게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하는데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이 점에서 우리의 선교적인 노력으로 그 분을 지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42)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게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는 가 능성이 다분히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별히 복음전도 사역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형기는 빌링겐의 Missio Dei를 평가하면서, “삼위일체론적 파송의 신학의 맥락에서 교회의 사회참여가 매우 강조되어 18-19세기적 복음전도가 대단히 약화되는 경향이었다”43)라고 지적한다. 파송에 대한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에도 세상으로의 파송 개념만을 채택하고, 교회가 특별히 선발한 사람을 특정지역에 파송하는 선교의 대사명에 대한 본문은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44) 그리하여 협의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보다는 각처의 억눌린 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하고 이들의 해방을 위해 힘써야 함을 강조하면서 자주 해방 투쟁과의 연대를 칭송하며 그 같은 일을 실천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예를 들어 1980년 호주 멜본 대회에서 개최된 제 3차 선교와 복음화 대회(CWME)는 ‘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제목으로 총체적 복음화론을 다루었다. 제 1분과에서는 주장하기를 선교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것이고, 가난이 아니라 충만이며, 노예가 아니라 자유며, 질병이 아니라건강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정의하고, 복음화의 중심 요소를 정의 사회를 위한 질서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라 하였
42) P. G. Aring, Kirche ein Ereignis: Ein Beitrag zur Neuorientieung der Missions-theologie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71), p.88.
43) 이형기,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나타난 선교신학,” in『선교와 신학』4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63쪽.
44)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111쪽.
352 長神論壇 22집(2004) - 352 -
다.45) 결국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영향으로 협의회는 사회적 관심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통적 전도의 개념인 복음에 의한 개인 영혼 구원의 차원을 약화시키면서 주로 사회구원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V. 하나님의 선교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위한 시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공헌점과 제한점 등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선교 개념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공헌하는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이 개념의 공헌점은 극대화하고 제한점은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새롭게 개념 정립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A. 철저한 겸손과 헌신을 요구하는 선교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반성에 그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즉 제국주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현지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외국의 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데 대한 반성이며, 자기만족이나 교세의 확장 같은 이기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선교에 대한 뉘우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적 선교자세를 갱신코자 하는 반성에서 대두된 하나님의 선교는 실제로 이런 잘못을 수정하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기구화 된 교회, 내향적인 교회, 수의 확장과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회들을 일깨워 줌으로 하나님의 전 우주적, 전역사적, 그리고 전 시간적인 구원의 사건을 식별토록 도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선교요, 이 선교에 동참하는 인간들의 선교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교에 임해야 하는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45) 이동주,『현대선교신학: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본 종교다원주의와 세속화 신학』(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8), 195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53 - 353 -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7-8)의 자세로 선교하셨다.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고자 하는교회는 이 예수의 길을 따라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선교를 해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주역들에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고 한 권면을 받아들여 우리도 철저히 겸손한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한다. 또한 모든 잘못되고 이기적인 동기들을 부숴 버리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요 7:18)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B. 하나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선교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면 선교는 하나님의 본연의 사역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고 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책임도 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46) 이것은 흔히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이 그의 선교를 수행하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교회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낙심치 아니하고 선교에 임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실 선교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질까 하는 회의에 빠질 수 있다.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이슬람의 부흥을 보면서,47) 이미 복음화가 되었던 유럽지역이 오히려 재복음화가 필요한 지역으로 퇴보되는 현상을 보면서48) 지상명령 완수
46) 칼 뮬러,『현대선교신학』김영동, 김은수, 박영환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2), 65쪽.
47) 회교는 1900년에 12.4%를 차지하였는데, 2000년에는 21.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물론 이 증가는 대부분 지역인구증가에 기인한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패트릭 죤스톤,『세계기도정보』559쪽.
48) 영국의 경우 상당수의 교회들이 회교사원으로 팔리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1800 여개의 개신교 교회마다 주일평균 참석교인이 20명 정도이다.; 안영권,
“한국교회선교의 비전과 협력”, in『한국교회선교의 협력과 비전』(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3), 198쪽.
354 長神論壇 22집(2004) - 354 -
의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가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이러한 의심들을 과감히 깨부순다. 우리 인간의 작은 머리로 다 측량할 순 없지만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를 위하여 필요한 일군들을 세우시고 훈련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반드시 그의 선교를 이루실 것이다.49) 선교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은 확신해야 한다. 비록 전하는 자가 실패하고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고 종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한다.50) 이런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과감하게 선교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헌신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길지 질지도 확실치 않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 사람은 없다. 분명히 승리하고 그 결과로 영원한 기쁨에 동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천할 때 헌신할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이런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C. 세상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지는 선교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신학의 방향에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강조하여 교회와 세계를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보아 온 희랍적인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그리스도의 현존의 자리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감을 일깨워주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곳에 사는 모든 창조물들의 구원과 행복에 대하여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창조물들의 행복을 위한 정의, 복지, 평화 등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선교의 중요한 차원이다. 이러한 것은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도큰 도움이 된다. 비셜후프트가 말한 것처럼 권력과 특권의식, 인종차별,
49) 개린 밴 뤼넨,『선교학 개론』홍기영, 홍용표 역 (서울: 서로 사랑, 2000),41쪽.
50) 위의 책, 42쪽.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55 - 355 -
부, 가난, 억압 등의 문제로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해결되어질 때에 복음을 들을 귀도 열어지는 것이다.51) 그러므로 선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또한 선교는 창조질서 보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종래의 보수적인 선교는 사회를 단지 멸망해가는 곳으로만 보면서 구원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에서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창조질서가 보존되어야 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식치 못했다. 오늘의 세상을 보면, 인간들은 자신을 창조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주변화 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착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시장 경제 속에서 제품의 생산과 소비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지구적 차원의 자원소모가 증가되어지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으로 저개발 국가에 진출한 선진자본은 그 지역에서의 자연착취를 가속화하고 있다. 거기다가 전 지구와 생태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핵문제가 바로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결코 방심하며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생태학적 한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52) 현재 이 세계는 환경오염과 파괴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며”(롬 8:22) 그의 구속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전 생태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참여는 선교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D. 구속사적 차원을 함께 강조하는 선교
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한 하르텐슈타인은 세계를 위한 예언자적 직무와 사도적 증거를 분리하지 않고 종말론적 시각과 구속사적 관점을 함
51) W. A. Vissert Hooft, New Delhi Speaks Out Christian Witness, Service and Unity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61), 43쪽.
52) 김은수, “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in『한국기독교신학논총』Vol. 30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544-547쪽.
356 長神論壇 22집(2004) - 356 -
께 가지면서 이 개념을 말하였다. 하지만 후켄다이크는 Missio Dei를 지나치게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만 해석하였고, 이러한 영향이 WCC에도 나타남을 보았다. 이런 이유로 WCC의 선교신학은 구속사적 관점에 비하여 현재적 종말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급진주의적인 신학이라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실제로 WCC의 방향은 세계에 대한 사도적 헌신에서 세계에 대한 봉사적 헌신으로 바뀌어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다시금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특별히 약화되어진 구속사적 측면에 다시금 강조점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강조하는 샬롬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뿌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죄악된 길로부터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개인적인 회심의 전도는 여전히 ‘Missio Dei'의 핵심적인 사항이 되어야 하며,53) 이 일을 위하여 교회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만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 단체들, 국제기구, 정부 들을 통해서도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와 기독교인들만이 독점한다고 생각은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평화와 샬롬을 구현키 위해 이들과 대화하고 협력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이며, 샬롬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다. 다른 어떤 세상의 기관도 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구속사적 관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이 사역에 더욱 힘써야 한다.
VI.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평을 하면서, 보쉬는 “...하르텐슈타인은 선교를 세속화와 수평화로부터 보호하고, 선교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53)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p. 64.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57 - 357 -
예속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다”54) 라고 말했다. 확실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석되면서 본래의 의도와 맞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 경향이 있다. 샬롬의 결과는 강조하되 그 근원을 약화시킨 것, 샬롬을 위한 도구로서의 교회를 약화시킨 것, 하나님의 선교활동에 대한 혼동 가능성, 그리고 선교의 불필요성을 조장할 가능성 등의 문제점을 배태하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무조건 거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확실히 우리는 보쉬가 말한 것처럼, “아직 무정형하고 희미한 패러다임의 경계선”55)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이런 시기에는 “지나치게 반동적이거나 지나치게 혁명적인 접근들”56)이 우리의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보쉬의 조언도 기억하면서 통전적이며 균형 잡힌 선교신학을 모색하는데 마음을 모두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거의 잊혀져왔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구속사적 측면을 다시 되찾아 균형 잡힌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세상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샬롬을 강
조하면서도 샬롬의 기초가 되는 복음전도의 차원을 함께 강조하는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개념으로 바로 이해되어지길 바란다.
54)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80쪽.
55) 위의 책, 544-546쪽.
56) 위의 책, 544-546쪽.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