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안 승 오(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지난 반세기 동안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일 것이다. 이 개념이 처음에는 주로 진보적 개신교 진영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잇따라서 동방정교회,가톨릭교회,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었다. 결국 이 개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그 교회들의 선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드 보쉬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지난 반세기의 선교신학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개념이었음을 말하고 있다.1)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또한 본래 그개념을 제창하였던 이들의 본래적인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음도 지적하고 있다.2) 즉 하나님의 선교는 뭔가 왜곡되고 편중되게 이해되어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개념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에 의한 선교 역시 부분적으로 왜곡되어진 점이 있게 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개념이 본래 어떤 의도에서 제안되어졌고, 어떻게 이해되어져 왔는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바른 방향 정립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선교 개념 태동 배경과 주된 내용
1) 데이비드 J.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김병길 장훈태 공역, (서울: 기독교문
서선교회, 2000), 576-577쪽.
2) 위의 책, 5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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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식민지가 붕괴되면서 서구선교는 많은 점에서 장애물을 만났다. 우선 많은 신생 독립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과거의 민속종교나 전래 종교로의 복귀를 시도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을입국 제한시키거나 추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또한 전 인류의 3분의 1 가량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권 아래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선교에 대한 강력한 방해 내지는 탄압이 자행되었으므로 서구 선교는 상당한 장애를 겪게 되었고, 많은 서구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선교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전통적인 선교활동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구 선교는 대단히 위축되게 되었다. 또한 서구교회는 자신들이 행해 온 선교가 제국주의 팽창과 깊이 연루되어서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죄악을 범하였으며, 2차에 걸친 야만적인 세계대전이 소위 기독교 국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 전쟁으로 자신들의 온갖 수치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비서구 세계에 말할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들이 전한 복음은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으로 옷 입혀져 있었으며, 자신들의 선교자세는 가부장주의, 비관용, 오만함 등으로 점철되었으며, 문화파괴, 사회구조 와해, 전통 종교 억압, 낯선 이방 교회 설립, 정체성 손상 및 정체성 형성의 저해 등을 가져오게 되었고, 피선교지의 교회가 서구에 종속되는 불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3)
아울러 이러한 잘못에 대한 비난까지 받으면서 서구교회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다가 과거에 선교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되던 제 3세계에도 제법 기독교가 많이 성장하게 되면서 불평등한 관계의 청산과 제국주의와 결탁한 서구교회와의 단절을 추구하면서 자립교회의 확립과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다.4)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952년 IMC(Internatioal Missionary Council)빌링엔 대회는 승리자나 정복자의 태도가 아닌 희생과 섬김의 자세가필요함을 깨닫고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 라는 주제로 선교대회를 가
3) 김영동,『교회를 살리는 선교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3),259-260쪽.
4)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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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정복적이고 전투적인 서구식 십자군의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십자가의 선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빌링겐 대회가 끝난 후 독일 슈트트가르트 교구의 감독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은 빌링엔 대회의 신학적 성과를 개인적으로 요약하면서 Missio Dei라는 라틴어 술어를 처음 사용하였다.5) 그러니까 이 용어는 전통적으로 행해왔던식민주의적인 오만한 선교자세를 교정하고 선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노력가운데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하르텐슈타인은 이 용어를 말할 때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적극수용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을 모든 인간적 열정(Pathos), 즉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속삭이는 모든 인간 중심주의(Anthropozentrismus)와 인간열정주의(Anthropotathismus)와의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 위치로 돌려놓은 것이 바르트의 신학이라고 보았고, 모든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해 위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학을 추구함으로써 그 당시 선교의 잘못된 동기와 목표를 수정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모든 인간중심주의와 인간 열정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선교의 개념을 변화시킨 ‘Missio Dei'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학적 원리의 절대화와 모든 형태의 선교의 자기 의인화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며, 그 분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하였다. 선교의 주체와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선교하는 자는 오직 그의 속죄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6)
그는 이같은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말함으로써 전통적인 개종과 교회 설립을 위한 선교를 넘어서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는 포
5) 그가 말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선교란 단순히 개인의 회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의 보내심(an der Sendungdes Sohnes), 즉 하나님의 선교(der Missio Dei)에 참여하는 것이다.”;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in Walter Freytag ed., Mission zwishen Gestern und Morgen (Stuttgart: Evang. Missionsverlag, 1952), p. 54.
6) K. Hartenstein, “Krisis der Mission?” in Die Furche 17 (1931), pp. 20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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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적이고 통전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를 말함으로써 선교신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 같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말할때, 그는 선교를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활동으로이해하는 종말론적 시각과 선교를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안의 결정적인 예표로 보는 구원사적 시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7)
III.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전개 방향
하르텐슈타인은 Missio Dei라는 용어를 처음 말하였지만 그 용어에 대한 자세한 배경이나 설명을 하지 못한 채, 곧 타계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에 Missio Dei개념은 비체돔과 후켄다이크에 의하여 더욱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체돔은 주로 구속사적 관점을 많이 강조한 반면, 후켄다이크는 주로 종말론적 관점을 많이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이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의하여 수용되어질 때는 주로 후켄다이크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어졌는지를 살펴보자.
A. 후켄다이크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사람은 네덜란드의 신학자 후켄다이크(J. C. Hoekendijk)이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전도부초대 간사 및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국제선교협의회(IMC)의 협력위원회 간사(1949-952)로 일했다. 후켄다이크의 불만은 우선적으로 교회가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 되고 선교 중심적이 되지 못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은 틀린 중심을 잡고 회전하기 때문에 항상 정도에서 벗어나기 마련이고 선교의 범위가 불가피하게 축소된다고 보았다. 즉 선교의 전 지평이 교회에 의하여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히
선교는 교회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고, 교회를 에워싼 세계를 교회론적인 범주로 정의하게 되며 세계는 더 이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들』(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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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훈련장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8) 아울러 이 같은 교회중심의 선교관은 선교를 곧 ‘교회화’로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형성과 교파증식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전도를 행할 때에도 “...교회의 영향력을 다시금 획득하려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다”9) 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교회중심적인 선교 이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고 이런 점에서 그는 교회중심적인 선교 이론을 맹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교회중심적 선교관을 ‘교회주의 이단’으로 보면서 교회론을 “왕국-복음-파송-세계”라는 틀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회를 “왕국-복음-파송-세계”의 컨텍스트 속에서 논의할 때에 여기에서 교회는 고정된 자리가 없다고 보았다.10)
똑같이 Missio Dei라는 용어를 말하면서도 아들의 파송이나 교회의 파송을 강조한 비체돔과는 달리 후켄다이크는 하나님 자신의 파송을 강조함으로써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하나님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는 교회가 교회적 구조들로부터 나와서 기동성 있는 그룹들로 개방되어야 하며, 세속화되어야 하고, 현대 세계속의 인간들과 완전한 동일화(full identificaion)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이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세계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이 강화되었지만, 교회의 중요성과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선교의 목표를 ‘샬롬’으로 보았다. 샬롬은 인간 영혼구원 이상의 것으로 평화, 정직, 공동체, 조화, 정의 등의 포괄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는 샬롬이 메시야가 추구한 핵심적인 요소라는 근거로 메시야가 평강의 왕이라는 말씀(사 9:6), 이 사람이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는 구절(미5:5), 그가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는 말씀(슥 9: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등을
8) J. Hoekendijk,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I.R.M., July, 1952, pp. 324-332.
9) J. C. 후켄다이크,『흩어지는 교회』이계준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10쪽.
10) J. Hoekendijk, “The Church in Missionary Thinking,” p. 333.
11) Ibid., pp.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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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12) 그는 샬롬을 사회적 사건으로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13) 교회는 이 샬롬을 만들어감으로써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 같은 샬롬 이해 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선교를 특별히 현재적 종말의 시각에서 많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선교를 처음 말한 하르텐슈타인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벌써’와 ‘아직 아니’의 철저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아직 아니’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 반면, 후켄다이크는 하나님의 활동과 실제 이 땅위에 펼쳐지고 있는 세계 역사를 직접적인 상관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를 현재적 종말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후켄다이크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지나치게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 해석한경향이 있었으며, 이것은 하르텐슈타인이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14)
B. 비체돔 (Georg F. Vicedom)
게오르규 F.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책을 써서 Missio Dei의 개념을 널리 퍼지도록 공헌한 사람이다. 그는 하르텐 슈타인의 ‘Mission Dei'를 주로 구속사적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를 하나님의 창조와 활동을 나타내는 총괄개념(Inbegriff)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의 선교 역사를 곧 ‘구원사’(Helisgeschichte)로 보았다. 그가 하나님의 선교를 구원사적으로 본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것과 반대인 이 세상 나라의 통치와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말할 수 있다고 믿는 바의 소원들을 결코 이루어주지 않는다. 그는
12) J. C. Hoekendijk,『흩어지는 교회』17쪽.
13) 위의 책, 17-18쪽.
14) 김은수,『현대선교의 주제와 흐름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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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결코 허용치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말한다.15) 이런 점에서 비체돔은 후켄다이크처럼 샬롬을 이 땅위에 이루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는 “...예수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은 항상 회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교회와 선교에 있어서 항상 그릇된 목표를 세울 것이며, 아무리 경건한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는 세상 나라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16)
라고 말하면서, 선교의 목표를 모든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일로 말하고 있다.17) 또한 비체돔의 교회관은 후켄다이크의 그것처럼 많이 부정적이지 않다. 물론 비체돔도 교회 자체가 선교의 출발점, 목표, 주체로 인식되는것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것은 선교를 위한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교회가 여전히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구속사 완성의 목표를 위하여 아들을 파송하며 아들의 파송은 그의 교회를 통해서 지속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첫 번째 선교사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원의 활동은 현재한다.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교회의 선교를 가능하게 하며 교
회는 하나님의 공적인 구원공동체로서 표시되고 구원의 역사적 현재로부각되는 것이다.18) 그는 선교의 목표를 “... 모든 인간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으는 일”19) 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의 교회의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후켄다이크가 선교의 과제를 세상에서 샬롬을 이루는 것으로 보면서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
15) 게오르크 F. 비체돔,『하나님의 선교』박근원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1980), 40-41쪽.
16) 위의 책, 41쪽.
17) 위의 책, 130-131쪽.
18) 위의 책, 163-164쪽.
19) 위의 책,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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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섬기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교회의 위치를 상당히 축소시킨 경향이 있는데 비하여,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교회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C. 세계 교회 협의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 방향을 정립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협의회는 1950년대 이후로 후켄다이크의 강한 영향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에 후켄다이크의 Missio Dei 개념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먼저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연관된 WCC의 선교목표를 보면 후켄다이크가 주장했던 선교의 목표인 샬롬이 주된 선교의 목표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서 샬롬의 범위는 교회 안이 아니라 전 세계를 포함하며, 영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실존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전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Missio Dei는 이 모든 것의샬롬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며 교회는 그 선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20)
이 같이 광범위한 샬롬이 내용이 WCC의 대회에서는 다양한 형태로표현되었는데, 1968년 웁살라 대회의 경우엔 인간화로 표현되었다. 웁살라 총회 제 2분과 위원회에서는 인간화(humanization)를 선교의 목표로삼았다. 즉 오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에 대한 문제이며, 모든 비인간화의 현상을 극복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의 일차적과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같은 인간화의 진정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되었으며, 예수의 인간성을 드러내어 예수와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선교의 주된 목표로 제시되었다.21)
또한 1975년 나이로비 대회에서는 선교의 주제를 “정의, 참여, 지탱될 만한 사회”(JPSS: a Just, Participatory, Sustainable Society)로 보았고, 1983년 벤쿠버와 1990년 서울 대회에서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JPIC: 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을 주제로 삼았으며,22)
20)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79쪽.
21) Norman Goodall, ed. The Uppsala Report 1968 (Geneva, WCC, 1968),pp.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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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캔버라로 오면서 창조질서의 보존을 특별히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시켰다. 즉 캔버라는 생명의 신학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초시키고, 창조세계 속에 현존하시는 성령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결과로 하나님의 선교는 매우 폭넓은 선교의 과제를 제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을 넘어서서 샬롬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역자의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 세계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하는 일들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간성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의 견지에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이해하면서 그 변화를 위한 일과 투쟁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초점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발견된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출발점이요 현장이다. 신자들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제 분야에 파송되어지고 교회와 세상은 분리가 아닌 공동 운명적인 연대관계에 선다. 그리스도의 주권성은 신자들에게 영적 진리에 대한 강조보다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고취시킨다.
즉 강조점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겨지면서 교회는 단지 세상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는 부름 받은 공동체인 교회로부터 출발하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현장인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세상에 강조점이 주어지면서 교회는 단지 구원받은 세계의 한 표상의 부분에 불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계는 세계이고 교회는 세계의 부분으로서 정의된다. 여기에서 전통적인 명제인 “하나님-교회-세계”의 순서는 “하나님-세계-교회”로 뒤바뀌게 된
다.23) 이 같은 이해 위에서 결국 선교의 주체가 교회이고 교회의 확장이 곧 선교의 성적표임을 말하던 교회의 선교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IV.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기여점 및 제한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확실히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이 개념은
22) 이형기,『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흐름에 나타난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333쪽.
23) WCC, The Church for Others: Two Reports on the Missionary Structure of the Congregation (Geneva: WCC, 1968), p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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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선교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 중의 하나가 되어 세계 선교의향방을 주도하면서 세계선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갱신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또한 여러 가지 약점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기여점과 약점을 잘 분석해보는 것은 이 개념의 새로운 방향정립을 위하여 중요한작업이 될 것이다.
A. 교회의 선교 자세를 갱신케 함
세상의 많은 기관들이 그렇듯이 지상위의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쉽게 내향적이 되고, 기구화 되고, 자체의 성장과 수적인 확장에만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선한 의도에서 선교를 하면서도 쉽사리 자기 교파의 확장과 강화와 유지를 위하여 공간적 및 양적 교세 확장적인 선교를 수행하게 되기 쉽다. 아울러 각파의 신앙고백과 신조를 중심한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교 사상과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 교파 혹은 개교회 중심의 선교사상과 운동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선교보다는 개 교회 혹은 개 교파의 이익과 명예를 앞세우는 선교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24)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이런 교회와 교회의 선교를 향하여 선교의 참된 인도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일깨워줌으로써 교회가 기구화 되고내향화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교회는 그 어떤 형태로든 그 자체가 절대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주었던 것이다. 또한 교회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증거 할 때 비로소 참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B.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일깨워 줌
이스라엘의 존재목적이 그러했듯이 교회의 존재 목적 역시 세상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결코 교회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종종 희랍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교회와 세계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보아온 경향이 있다. 교회는 종종 자신만을 위한 담을
24) 이장식,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검토,”『기독교 사상』1977년 6월호, 7쪽.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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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쌓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세상에 대하여는 무책임한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이바로 세계에 있음을 강하게 일깨워주었고, 이로 인해 격변하는 세계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아울러세계에 대한 눈을 열어줌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선교의 영역과 과제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25)
C. 선교 개념의 폭을 넓혀 줌
보쉬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우리가 다시 좁고 교회 중심적인 선교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26)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선교 개념을 폭넓게 만든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선교개념을 무작정 넓혀서 선교의 핵심자체를 놓치고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제대로 실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나 선교의 과제를 제대로 일깨워주어서 사회구조개편과 창조 질서의 회복 등의 주제를 선교에 포함시킴으로 말미암아 폭넓은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선교가 영혼구령과 교회개척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위한 예언적 직무와 사도적직무를 균형감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준 것은 Missio Dei의 공헌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신학의 방향에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음으로써 선교를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D. 샬롬 개념의 편중
하나님의 선교에 의한 선교의 목표는 샬롬으로 제시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후켄다이크가 이해한 샬롬은 주로 사회적 사건이며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생명에 관
25) 김은수,『현대선교의 주제와 흐름들』125쪽.
26)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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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되며 그 안에 종사하고 있는 손길들을 통해 ‘생명과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27) 교회는 이 평화를만들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이를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샬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상당 부분 현실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샬롬, 즉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샬롬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샬롬의 개념은 구약에 많이 나타나며, 구약에 사용된 ‘샬롬’의 정의 중 일부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샬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샬롬 개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샬롬이란 하나님께서 계약에 따라 행동하신 결과이자 공의의 결과라는 사실이다(사 32:17).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지 아니한 샬롬은 거기에 어떠한 샬롬의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구약이 의도하는 샬롬이 아니다. 구약이 말하는 샬롬은 평정, 평강, 안정 등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즉 구약에 나타난 샬롬은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되는 것이다.28) 즉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의 샬롬이든 정치적 사회적차원의 샬롬이든 그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켄다이크와 WCC의 샬롬 이해는 샬롬의 근본 뿌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샬롬의 결과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또한 샬롬의 내용을 개인적인 차원의 것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것으로 많이 강조하는 경향도 한편으로 편중된 느낌이 있다.29)
E. 교회 자체의 약화를 가져옴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르텐슈타인이나 비체돔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도 교회의 위치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았다. 하르텐슈타인은 “교
2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125쪽.
28) R. 레어드 해리스 외,『구약원어신학사전 하』(서울: 요단출판사, 1986),1163-1164쪽.
29) 이현모,『현대선교의 이해』(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2000),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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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는 땅위의 그리스도의 통치의 중심이자 세계 역사의 중심”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수행자(Trägerin)”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는 공동체30)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호켄다이크와 그 영향을 받은 WCC는 세상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다가 그만 교회를 너무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물론 그들이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너무 지나치게 한쪽을 강조하다가 다른 한쪽을 놓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후켄다이크의 신학은 무교회신학(non-church theology)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31) 서정운은 후켄다이크의 선교신학에 대하여 많은 공헌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교회관에 대하여 평가하면서 “어쩌면 오늘의 서구교회가활력을 잃고 신자의 수가 현저히 준 것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은 반교회중심신학(反敎會中心神學)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32)고말한다.
후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가 왜 이처럼 약한 교회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까? 후켄다이크는 교회가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세속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이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한 것은 좋지만, 교회와 세상 사이의 담이 완전히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 결국 교회는 세상을 제대로 섬길 수 없게된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정체성 유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속에서 잘 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의 종국적인 목적은 열방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기에 이스라엘이 열방과 섞이는 것을 엄히 경계하셨다. 어차피 열방을 섬길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열방과 교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왜 그토록 철저하게 열방과 섞이는 것을 막으셨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먼저 확실히 세우시려는 목적에서
30) Karl He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pp. 58f.
31) Thomas Shivute, “The Theology of Mission and Evangelism,” in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from Edinburgh to New Delhi (Helsinki:The Finish Society for Missiology and Ecumenics, 1980), p. 194.
32) 서정운, “후켄다이크의 선교관” in『교회와 신학』제 20집, 1988년,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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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섬기는 것에 앞서서 해야 할 일은 먼저 자신의정체성을 굳건하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이었다.33)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바로 섬긴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것보다 더 앞서서 해야 할 일은 바로 교회를 바로 서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교회를 무시하며, 전통적 교회를 타락의 상징처럼 보는 경향은 오히려 교회가 제대로 세상을섬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후켄다이크의 오류는 성과 속의 구분을 완전
히 철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교회로 하여금 더욱 세상을 잘 섬길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치 막시즘이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켄다이크의 생각 역시 현실화되지 않았다.34) 교회가 세상을 참으로 섬기고 변화시키려면 여전히 성과 속은 구분되어야 하고, 성을 성으로 유지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교회 자체의 성스러움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세상을 섬기어 성스럽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후켄다이크는 또한 하나님의 선교가 세상 속에 있는 세속적인 기관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역사하시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불러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의 사람들이나 세속적인 기관들이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위하여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과 동일하게 인식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필요도 없었고, 이스라엘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실 필요가 없었다. 선지자들을 보내실 필요도 없었고, 제자들을 따로 세우실 필요도 없으셨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속적인 기관들을 통해서도
33) John H. Piet, The Road Ahead: Theology for the Church in Mission(Grand Rapids, MI: Eerdmans, 1970), pp. 41-42.
34) 채수일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고 실천했던 교회의 목회자들이 가난 때문에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을 지속할 수 없어서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선 반면,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엄청난 자본의 힘을 가지고 대규모적으로 사회봉사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채수일,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한국에서의 전개와 과제” in 선교와 문화,『선교신학』제 6집 (서울: 한들출판사,2002),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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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고 하면서 교회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주장은 구원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선교에서 일할 사람이 많다는 것을자꾸 강조하면 결국 교회는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가 아니어도 일할 일군이 많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할 동기가 많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쉬는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들을 단지 기능적으로, 결론적으로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호켄다이크의 경향은 우리를 어디에도 인도하지 못한다.”35) 아울러 보쉬는 평생을 통해 가차 없이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론을 위한여지가 전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호켄다이크 마저도 후에는 교회를향하여 등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발견했다고 언급한다.36)
F.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혼동 가능성
후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로 세상에서그리고 세상의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그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사회 정의와 복지를 위한 모든 활동도 다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하나님의 선교는 역사발전, 역사와 종말론의 문제 및 역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역사 내재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구속사를 세속사와 완전히 일치되게 보는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적 참여를 높일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반면, 사회적 해방이 기독교의 구원으로 혹은 정치적 투쟁이 선교 활동으로 인식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37) 이런 점에서 보쉬는 “세속역사와 구속역사가 비록 분리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건설이 직접적으로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지 않는다”38)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35)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697-698쪽.
36) 위의 책, 572쪽.
37)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들』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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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논리에 따르면 구조적 악이 있고 이에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면 이는 하나님의 선교이고 교회는 이 활동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어서 협력해야 하고 이것이 교회의선교가 된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행위를 통해 실현되는 사회정의가 하나님의 일로 암시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혁명적 행동이 하나님의 일로 신성시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회적, 구조적 악에 대항하는 활동들 중에는 그 결과가 또 다른구조적 모순을 만들거나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볼 때에 악에 대항하는 운동을 섣불리 하나님의 선교와 동일시하는 것엔 문제가있음을 보게 된다.39) 이런 점에서 덴마크의 선교학자 아가르도는40)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잘못되면 인간의 모든 세속적 활동을 무조건 거룩한 것으로 인정하는 모순을 범한다고 지적하였다.41)
H. 복음 전도 중심의 선교 약화 가능성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조금 극단화되면 전통적인 복음 선교가 불필요하거나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배제되는 지점까지 나갈 수 있게된다. 하나님의 선교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선교를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교회의 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 나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잘못 강조38)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74쪽. 죤 브라이트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국가나 정치, 또는 국가의 부강함과 번영, 심지어 종교나 종교 개혁을위한 온갖 노력,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백성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땅의 질서는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의 근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우스꽝스럽게 모방한 것 밖에 안된다.”; 죤 브라이트,『하나님의 나라』김철손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92), 163쪽.
39) 이현모,『현대선교의 이해』87쪽.
40) Johannes Aagaard, “Mission After Uppsala 1969,” Mission Trends No.1, Gerald Anderson, ed. (Grand Rapids, Eerdmans, 1974), p. 17.
41)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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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다보면 하나님의 선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적 기여를 결코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링(Aring)에게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하는데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이 점에서 우리의 선교적인 노력으로 그 분을 지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전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42)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게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는 가 능성이 다분히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별히 복음전도 사역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형기는 빌링겐의 Missio Dei를 평가하면서, “삼위일체론적 파송의 신학의 맥락에서 교회의 사회참여가 매우 강조되어 18-19세기적 복음전도가 대단히 약화되는 경향이었다”43)라고 지적한다. 파송에 대한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에도 세상으로의 파송 개념만을 채택하고, 교회가 특별히 선발한 사람을 특정지역에 파송하는 선교의 대사명에 대한 본문은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44) 그리하여 협의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보다는 각처의 억눌린 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하고 이들의 해방을 위해 힘써야 함을 강조하면서 자주 해방 투쟁과의 연대를 칭송하며 그 같은 일을 실천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예를 들어 1980년 호주 멜본 대회에서 개최된 제 3차 선교와 복음화 대회(CWME)는 ‘나라이 임하옵시고’ 라는 제목으로 총체적 복음화론을 다루었다. 제 1분과에서는 주장하기를 선교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것이고, 가난이 아니라 충만이며, 노예가 아니라 자유며, 질병이 아니라건강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정의하고, 복음화의 중심 요소를 정의 사회를 위한 질서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라 하였
42) P. G. Aring, Kirche ein Ereignis: Ein Beitrag zur Neuorientieung der Missions-theologie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71), p.88.
43) 이형기, “에큐메니칼 운동사에 나타난 선교신학,” in『선교와 신학』4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63쪽.
44) 전호진,『한국교회와 선교 II』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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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45) 결국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영향으로 협의회는 사회적 관심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통적 전도의 개념인 복음에 의한 개인 영혼 구원의 차원을 약화시키면서 주로 사회구원을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V. 하나님의 선교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위한 시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공헌점과 제한점 등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선교 개념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공헌하는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이 개념의 공헌점은 극대화하고 제한점은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어떠한 방향으로 새롭게 개념 정립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A. 철저한 겸손과 헌신을 요구하는 선교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반성에 그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즉 제국주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현지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외국의 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데 대한 반성이며, 자기만족이나 교세의 확장 같은 이기적인 욕구에서 비롯된 선교에 대한 뉘우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처럼 제국주의적 선교자세를 갱신코자 하는 반성에서 대두된 하나님의 선교는 실제로 이런 잘못을 수정하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기구화 된 교회, 내향적인 교회, 수의 확장과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회들을 일깨워 줌으로 하나님의 전 우주적, 전역사적, 그리고 전 시간적인 구원의 사건을 식별토록 도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선교요, 이 선교에 동참하는 인간들의 선교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교에 임해야 하는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는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45) 이동주,『현대선교신학: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본 종교다원주의와 세속화 신학』(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8),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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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7-8)의 자세로 선교하셨다.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고자 하는교회는 이 예수의 길을 따라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선교를 해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주역들에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고 한 권면을 받아들여 우리도 철저히 겸손한 자세로 선교에 임해야한다. 또한 모든 잘못되고 이기적인 동기들을 부숴 버리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요 7:18)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B. 하나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 선교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면 선교는 하나님의 본연의 사역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계획하고 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책임도 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46) 이것은 흔히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오해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님이 그의 선교를 수행하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교회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가운데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낙심치 아니하고 선교에 임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실 선교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질까 하는 회의에 빠질 수 있다.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이슬람의 부흥을 보면서,47) 이미 복음화가 되었던 유럽지역이 오히려 재복음화가 필요한 지역으로 퇴보되는 현상을 보면서48) 지상명령 완수
46) 칼 뮬러,『현대선교신학』김영동, 김은수, 박영환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2), 65쪽.
47) 회교는 1900년에 12.4%를 차지하였는데, 2000년에는 21.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물론 이 증가는 대부분 지역인구증가에 기인한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패트릭 죤스톤,『세계기도정보』559쪽.
48) 영국의 경우 상당수의 교회들이 회교사원으로 팔리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1800 여개의 개신교 교회마다 주일평균 참석교인이 20명 정도이다.; 안영권,
“한국교회선교의 비전과 협력”, in『한국교회선교의 협력과 비전』(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3),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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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가 스며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이러한 의심들을 과감히 깨부순다. 우리 인간의 작은 머리로 다 측량할 순 없지만 선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를 위하여 필요한 일군들을 세우시고 훈련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반드시 그의 선교를 이루실 것이다.49) 선교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은 확신해야 한다. 비록 전하는 자가 실패하고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될 것이고 종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한다.50) 이런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과감하게 선교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헌신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길지 질지도 확실치 않은 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 사람은 없다. 분명히 승리하고 그 결과로 영원한 기쁨에 동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천할 때 헌신할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이런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C. 세상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지는 선교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신학의 방향에 사회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강조하여 교회와 세계를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보아 온 희랍적인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그리스도의 현존의 자리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감을 일깨워주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곳에 사는 모든 창조물들의 구원과 행복에 대하여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창조물들의 행복을 위한 정의, 복지, 평화 등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선교의 중요한 차원이다. 이러한 것은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도큰 도움이 된다. 비셜후프트가 말한 것처럼 권력과 특권의식, 인종차별,
49) 개린 밴 뤼넨,『선교학 개론』홍기영, 홍용표 역 (서울: 서로 사랑, 2000),41쪽.
50) 위의 책,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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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가난, 억압 등의 문제로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문제들이 적극적으로 해결되어질 때에 복음을 들을 귀도 열어지는 것이다.51) 그러므로 선교는 이러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또한 선교는 창조질서 보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종래의 보수적인 선교는 사회를 단지 멸망해가는 곳으로만 보면서 구원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에서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창조질서가 보존되어야 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져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거의 인식치 못했다. 오늘의 세상을 보면, 인간들은 자신을 창조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주변화 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착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시장 경제 속에서 제품의 생산과 소비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지구적 차원의 자원소모가 증가되어지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으로 저개발 국가에 진출한 선진자본은 그 지역에서의 자연착취를 가속화하고 있다. 거기다가 전 지구와 생태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핵문제가 바로 우리곁에 도사리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결코 방심하며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생태학적 한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52) 현재 이 세계는 환경오염과 파괴 그리고 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며”(롬 8:22) 그의 구속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전 생태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참여는 선교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D. 구속사적 차원을 함께 강조하는 선교
하나님의 선교를 주창한 하르텐슈타인은 세계를 위한 예언자적 직무와 사도적 증거를 분리하지 않고 종말론적 시각과 구속사적 관점을 함
51) W. A. Vissert Hooft, New Delhi Speaks Out Christian Witness, Service and Unity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61), 43쪽.
52) 김은수, “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in『한국기독교신학논총』Vol. 30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544-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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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가지면서 이 개념을 말하였다. 하지만 후켄다이크는 Missio Dei를 지나치게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만 해석하였고, 이러한 영향이 WCC에도 나타남을 보았다. 이런 이유로 WCC의 선교신학은 구속사적 관점에 비하여 현재적 종말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급진주의적인 신학이라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실제로 WCC의 방향은 세계에 대한 사도적 헌신에서 세계에 대한 봉사적 헌신으로 바뀌어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다시금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특별히 약화되어진 구속사적 측면에 다시금 강조점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강조하는 샬롬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뿌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죄악된 길로부터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개인적인 회심의 전도는 여전히 ‘Missio Dei'의 핵심적인 사항이 되어야 하며,53) 이 일을 위하여 교회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만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 단체들, 국제기구, 정부 들을 통해서도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를 교회와 기독교인들만이 독점한다고 생각은 배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평화와 샬롬을 구현키 위해 이들과 대화하고 협력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이며, 샬롬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다. 다른 어떤 세상의 기관도 이 일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구속사적 관점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이 사역에 더욱 힘써야 한다.
VI.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평을 하면서, 보쉬는 “...하르텐슈타인은 선교를 세속화와 수평화로부터 보호하고, 선교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53)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p. 64.
안승오,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님의 선교 357 - 357 -
예속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다”54) 라고 말했다. 확실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석되면서 본래의 의도와 맞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 경향이 있다. 샬롬의 결과는 강조하되 그 근원을 약화시킨 것, 샬롬을 위한 도구로서의 교회를 약화시킨 것, 하나님의 선교활동에 대한 혼동 가능성, 그리고 선교의 불필요성을 조장할 가능성 등의 문제점을 배태하게 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무조건 거부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확실히 우리는 보쉬가 말한 것처럼, “아직 무정형하고 희미한 패러다임의 경계선”55)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아울러 이런 시기에는 “지나치게 반동적이거나 지나치게 혁명적인 접근들”56)이 우리의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보쉬의 조언도 기억하면서 통전적이며 균형 잡힌 선교신학을 모색하는데 마음을 모두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거의 잊혀져왔던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구속사적 측면을 다시 되찾아 균형 잡힌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세상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샬롬을 강
조하면서도 샬롬의 기초가 되는 복음전도의 차원을 함께 강조하는 개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개념으로 바로 이해되어지길 바란다.
54) 데이비드 보쉬,『변화하고 있는 선교』580쪽.
55) 위의 책, 544-546쪽.
56) 위의 책, 54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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